벼슬은 단지 권력이 아니라, 그 위에 얹힌 수많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무거운 짐이다. 그런데 최근 산청의 허위 보고부터 구리시장의 외유 논란까지 여러 사건은 공직기강 해이에 따른 국민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재명 대통령이 산청 시천면의 산불·폭우 피해 현장을 방문해 “산불 지역에 산사태가 없었는가?”라며 세 차례나 확인했음에도, 정영철 산청 부군수는 “피해 없다”, “문제 없다”라고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파손된 창고, 덮친 감나무 농장, 민가 10m까지 흘러든 토사와 나무, 양봉·곶감 농장의 피해는 명확했다. 주민들은 대통령 앞에서 “여기 산사태가 없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눈도 귀도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며 분노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닌, 공공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현장 외면’이었다. 국민의 안전은 한순간의 허위 보고로 무너질 수 있다. 산사태는 눈에 보이지 않던 위험이었는데, 공직자의 생략 보고로 인해 대응이 늦어지거나 잘못된 정책 방향이 세워질 가능성이 생긴다. 이 경우 행정은 선제적 대응이 아닌 사후 수습에 머물고,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에게 전가된다. 그나마 이 문제가 공식적으로 드러나고, 대통령의
매년 우리는 익숙한 장면을 반복한다. 재난이 발생하고, 관계자는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며, 정부는 범정부 회의를 소집한다. 언론은 “예고된 인재였다”는 헤드라인을 내보내고, 지자체는 “사전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비슷한 구조, 유사한 양상의 사고를 마주하게 된다. 2022년 이태원 참사, 2023년 오송 지하차도 침수, 그리고 2025년 7월 오산 옹벽 붕괴까지. 위험은 이미 경고됐고, 대응할 시간도 있었지만, 행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번 오산 옹벽 붕괴사고는 민간인의 신고와 경찰의 침하 통보가 모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당 공무원이 “현장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단 한 줄로 대응을 마쳤고, 그 몇 시간 뒤 시민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단순한 구조물 사고가 아니라, 이 나라 행정이 여전히 ‘사고 이후 대응’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위험을 사전에 예측하고 조치하는 ‘예방 설계 행정’이 부재하다. 시스템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위기를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태도와 구조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지자체가 재난 CCTV, 기상 관측 시스템, 예경보 장
한때 ‘연수원’으로 불리던 공무원 교육기관은 지금도 여전히 교과서와 강의실 중심의 관성에 머물러 있다. 디지털 기술이 급변하고 국민의 행정 수요가 다변화하는 시대, 그 변화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공직교육은 오히려 가장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중앙부처 소속 공무원 교육기관’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교육 대상과 방식 모두에서 과거의 틀을 반복하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지금은 교육 그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지금의 공직교육은 공공정책 실행력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정책과 성과를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특히 다양한 행정환경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역량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오늘날, 기존의 고정된 교육 방식으로는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2025년 공무원 인재개발 종합계획은 '성과중심의 정책기여형 HRD'로의 전환을 제시하며, 단순 교과 편성이나 교수법 개선을 넘어 정책성과와 연계된 교육 설계체계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디지털 플랫폼 정부, 탄소중립, 국민 참여형 정책수립 등 새로운 행정수요에 능
“도대체 이 공사엔 누가 감독을 한 겁니까?” 2024년 하반기, 수도권 한 공공시설 보수공사 현장에서 작업자 2명이 질식으로 숨졌다. 감사원 조사관이 사고 당일 작성된 보고서를 확인했을 때, 놀랍게도 ‘현장감독 책임자’ 란에는 어떤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발주기관은 “감리업체가 맡은 일”이라며 발을 뺐고, 감리사는 “계약상 지시권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감독자는 실종됐고, 책임도 함께 증발했다. 공공공사에서 반복되는 사고 뒤에는 늘 비슷한 말이 따라붙는다. “하도급은 금지였고, 계약상 책임은 없다.” 하지만 감사원에 따르면 전국 14개 공공기관의 공사현장 70% 이상이 감독권한을 외주에 넘기거나, 실질 감독이 이뤄지지 않아 안전관리 공백 상태에 놓인 것으로 드러났다(감사원, 2024). 계약서에는 조항이 존재하지만, 실제 현장에는 조항을 집행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공기관이 스스로를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중간 관리자’로 인식하는 순간, 감독 책임은 계약의 문장 속으로 증발하고 만다. 감리업체는 “지시권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발주기관은 “형식상 하도급 금지는 했지만 몰랐다”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몰랐음’은 더 이상 면책의 이유가 될
2022년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본격 시행되었다. “더 이상 죽음에 책임이 없는 사회는 없다”는 외침 아래 시작된 이 법은, 산업현장의 반복된 참사를 막고 경영책임자에게 생명의 무게를 각인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시행 3년이 지난 지금, “법이 존재함에도 왜 죽음은 계속되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현장에서의 변화는 분명 있었다. 고용노동부(2024)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 사업장은 2024년 기준 약 2만 7,000곳에 달한다. 그러나 실제 처벌로 이어진 기업 수는 법 시행 2년간 70여 건에 불과하고, 기소된 경영책임자 수는 30명을 넘지 않는다. 이 통계는 법이 ‘존재’하지만, ‘작동’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원청이 안전관리의 최종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하청과 재하청을 반복하며 법적 책임을 구조적으로 분산시켰다. 작업자 안전관리도 외주화 되고, ‘위험성 평가서’는 서류상 작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사고 발생 시 ‘형식상 의무 이행’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법무법인 세종이 발표한 『대통령선거 이후 안전보건 체계 개편 방향』에서도 이러한 점이 언급된다. 보고서는 “현행
인천 굴포천 맨홀 안에서 노동자가 “가스가 있다”는 마지막 외침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간 동료는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되었다. 이들의 작업 환경에는 기본적인 유해가스 측정 장비도, 안전 교육도 없었다. 더욱이 이 현장은 원청에서 재하청, 그리고 또다시 재재하청을 거쳐온, 이른바 ‘3중 하청’ 구조였다. 사망한 노동자가 일한 곳은 계약서상 어디에도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지 않은, 비용의 끝자락에 놓인 ‘최종 수급자’의 작업장이었다. 이는 예외적인 비극이 아니다. 건설, 플랜트, 지하 설비 등 위험한 노동이 필요한 산업 현장에서 이와 같은 3중 하청 구조는 관행처럼 굳어져 왔다. 재하청이 이루어질수록 안전은 멀어지고, 책임은 아래로만 전가된다. 발주처는 ‘직접 시공이 아님’을 이유로 책임에서 물러서고, 원청은 하청 계약서에 ‘안전 책임은 하청에게 있다’는 문구 하나로 면책을 시도한다. 그러나 위험은 결국 가장 낮은 곳에서 터지며, 그 대가는 목숨이라는 가장 고귀한 비용으로 치러진다. 2025년 7월, 인천 계양구의 맨홀 안에서 벌어진 참사 사고로 밝혀진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인천환경공단이 발주한 지리정보 구축사업은 지역 측량업체에 발주되었고, 이 업체는
2025년 7월 3일,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30일을 맞은 첫 기자회견에서 “인사는 정책 수행을 위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같은 색깔 사람만 쓰면 위험하다”, “시멘트만으로는 콘크리트가 안 된다”는 상징적 비유도 덧붙였다. 실용성과 조화의 인사 철학을 드러낸 발언이었지만, 국민은 단지 그 언어보다 인사의 맥락과 구성을 통해 정권의 방향성과 진심을 읽으려 한다. 인사는 단순한 업무 지시의 도구가 아니라, 통치의 시작이자 리더십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정권 출범기 인사는 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과거 정부들도 이 인사에서 시작해 정권의 방향을 드러냈다. 노무현 정부는 이상적 지향을 실현하려다 ‘코드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명박 정부는 실용을 내세웠지만 관료 조직과 충돌하며 실행력이 흔들렸다. 문재인 정부는 인사청문회 실패와 검증 논란으로 시스템 신뢰에 타격을 입었으며, 윤석열 정부는 검찰 출신의 편중된 기용으로 “내 사람 챙기기” 논란에 직면했다. 인사는 곧 정권의 철학이고, 리더십의 전략이며, 국민과 맺는 신뢰 계약의 첫 장이다. 이재명 정부는 초반부터 ‘통합형 인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실제로 노동계, 지역 기반 인사,
기자의 질문은 언제나 비슷하지만, 대통령의 자리가 바뀌면 질문이 던지는 힘도 달라진다. 오는 7월 3일,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한 달 만에 첫 기자회견을 연다. 역대 대통령들이 통상 취임 100일 즈음 기자회견을 해온 관행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행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번 회견이 ‘타운홀 미팅’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단상에 올라 일방적으로 질문을 받는 구조가 아니라, 기자들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마주 앉아 묻고 답하는 방식의 공개 소통이 예고되어 있다. 대통령실은 이번 회견에 대해 “국민의 궁금증을 수집한 뒤 직접 소통하는 형식으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아직 구체적인 구성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지난달 광주에서 진행된 시민 간담회의 흐름을 떠올려보면, 대변인이 사회를 맡고 대통령이 중간부터 직접 질의에 응답하거나 진행을 병행하는 즉문즉답 형식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크다. 이는 단순한 형식 변화가 아니라, 정치적 소통의 방식과 리더십의 태도까지 바꾸는 실험적 시도로 해석된다. 기존의 기자회견은 질문자가 통제되고, 응답자는 메시지를 방어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타운홀 형식은 질문의 자유도와 응답의 책임성을 동시에 높인다. 권력은 말을 통해 검증되고
“막아낸 성과도 보상받아야 한다.”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던진 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헌신과 침묵 속에서 국가를 지켜낸 이들의 노력을 이제는 공적으로 평가할 시점임을 선언한 발언이다. 오늘도 재난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이들의 노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공공의 이익을 위한 무명의 수고가 당연시되는 현실은, 여전히 우리 행정 철학이 결과 중심주의에 갇혀 있음을 방증한다. 공직사회는 오랜 기간 ‘보여주는 성과’에 매달려 왔다. 숫자로 환산되는 보고서, 단기 프로젝트, 화려한 발표회가 ‘일 잘한다’는 증표처럼 간주됐다. 그러나 위기를 비켜간 일상도 누군가의 조용한 기여 덕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진짜 기적은 실패를 막고 위기를 피한 일상 속에 있다. 이 ‘조용한 성과’는 수치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떠받치는 본질적 기여다. 문제는 이러한 공로를 가시화할 제도적 장치가 여전히 미비하다는 점이다. 노한동 전 문체부 공무원은 저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에서 “개인은 유능해도 조직은 무능해진다”고 꼬집었다. 공직사회에 만연한 과도한 형식주의, 회의 반복, 무의미한
3년 전, 수원은 조용한 방식의 변화를 선택했다. 거창한 구호보다 실용적 행정, 당선 축하보다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먼저 고민한 시장이 등장했다. 선거의 열기보다 시민의 삶에 스며드는 ‘행정의 온도’를 높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으로, 이재준 시장은 민선 8기 수원시정을 시작했다. 전통 정치 기반도, 강한 정파성도 아닌, 행정전문가 출신으로서의 균형 잡힌 시정 운영은 시민들의 신뢰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이재준 시장의 지난 3년은 ‘과정 중심의 행정’을 강조한 시기로 평가된다. 대규모 토건 사업이나 단기 성과에 집중하기보다는, 시민 삶의 질을 바꾸는 작고 실질적인 정책들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민원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골목상권을 챙기며 실질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행보는 기존의 관료적 행정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그 과정에서 행정에 대한 소신과 실천 철학이 구체적 장면으로 드러났다. 특히 기업 유치, 청년 일자리 기반 조성, 문화·복지 인프라 확장, 탄소중립형 도시 설계 등은 수원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였다. 수원은 이미 고밀도 도시이지만, 이 시장은 ‘첨단산업 유치’와 ‘창업 생태계 조성’을 통해 산업 재편을 모색했고, 실제로 2023년
❚ “결심이 아니라 실천이 통치다. 국민은 말보다 결과를 기억한다.” 2025년 대한민국의 국정 운영이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시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바뀌는 인물이 아니라 “말뿐인 정치가 반복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은 곧 국가의 방향이며, 장관의 발표는 행정부의 약속이고, 고위 공직자의 결심은 행정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말’은 넘치고, ‘실행’은 자주 실종된다. “결정은 있었으나 행동은 없었다”는 말은 재난 대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정책, 예산, 규제, 개혁에 이르기까지 각종 선언은 화려했지만, 정작 실행으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그 간극은 결국 국민이 메우고, 그 대가는 시민의 삶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이 간극의 반복은 공직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비롯된다. 첫째, 보고 중심주의가 낳은 왜곡이다. 정책은 실적 중심 문서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종종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회의록에 불과하다. 둘째, 보신주의와 면피 문화가 낳은 무기력이다. “잘못된 판단보다 움직인 것이 더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구조 속에서, 행동은 곧 리스크가 된다. 이로 인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셋
❚ 무릎을 굽힌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행동이 아니라, 국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정신의 표현 2025년 6월 4일, 대통령의 취임 선서식 직후, 대한민국은 상징적이면서도 전례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국회 청소노동자들 앞에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며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단순한 예우 차원의 퍼포먼스로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가 정치에 입문한 이유, 그리고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한 사람”이라 일컬어온 그의 삶의 배경과 철학이 응축된 행위로 받아들였다. 대통령이 가장 먼저 찾아간 이들이 청소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 채 그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은 태도는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묻게 했다. 그것은 단순한 ‘소통’의 제스처가 아니라, 국민과 권력이 맺어야 할 관계의 모델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명확히 제시하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진정성은 ‘시작’보다 ‘지속’에 있다. 아무리 진심 어린 출발이라도 그 자세가 시간이 흐르며 흐려지고, 국민보다 권력 내부의 시선에 더 익숙해진다면, 초심의 감동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쓴소리 참모’의
❚ 지방이 스스로 설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한민국’이 완성된다 “고향은 아직 그 자리에 있지만, 돌아갈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강원도 태백에서 대학을 졸업한 26세 청년은 다시 서울로 향했다. 지역엔 일자리도, 배움도, 친구도 없다. 그리고 이제는 세금조차 수도권을 향해 흐른다. 2024년, 대한민국은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국가지만 삶의 조건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완전히 갈라져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인구소멸위험지역은 전체 기초지자체의 절반 이상인 121곳으로 늘었으며, 지방 대학 입학정원 미달률은 41.6%에 달한다. 동시에 지방재정 자립도는 평균 30%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군 단위 자치단체는 자체 수입보다 의존재원이 더 많다. 정부는 ‘RISE(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와 ‘글로컬 대학 30 프로젝트’를 출범시켰고, 대선 후보들도 ‘서울대 10개 만들기’, 제2공공기관 이전, 지역특화 교육기관 육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제도 설계는 여전히 중앙 중심이며, 지방 재정의 현실이나 청년 유출의 본질적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다. 균형발전의 실패는 곧 삼각의 균열로 이어진다. 사람이 떠나는 지역에는 대학이 문을 닫고, 대학이 사라진 지역에는 산
[김한준 칼럼] “퇴직 후 10년, 소득이 42% 감소한다.” 충격적인 통계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 고령자의 은퇴 이후 소득절벽 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만 58세에 평균 311만 원이던 소득은 만 68세에 180만 원으로 무려 42%나 급감했다. 이러한 소득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는 연령 증가(49%)와 주된 일자리 이탈(40%)이 지목되며, 특히 고소득자와 고학력자일수록 그 충격이 더욱 크다(한국고용정보원, 2024). 이러한 현실은 한국의 노인빈곤율이 OECD 1위라는 불명예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소득이 줄어드는 데 있지 않다. 퇴직과 동시에 개인의 정체성이 붕괴되고,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이 급격히 무너지며, 자존감은 빠르게 낮아지고 몸과 마음은 서서히 무기력에 잠식된다. 고전에서는 “川流不息(천류불식)”—강물은 멈추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퇴직 후의 시간은 마치 정체되어버린 듯 흐름을 잃는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주저하는 이유는 단순히 준비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 초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통계청은 2025년
[김한준 칼럼] “내가 원하는 건 성공이 아니라, 생존이다.” 한 청년의 SNS 글귀가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주거, 일자리, 정치적 대표성, 복지 사각지대 등 삶의 전반에서 청년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이들은 더 이상 미래를 꿈꾸기보다 현재를 버티는 데 집중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20대 청년의 주거비 부담률은 평균 소득의 35%를 초과하고, 비정규직 비율은 45%에 달한다. 청년층 정치참여율은 60%를 넘지 못하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들은 전체의 30% 이상으로 추산된다. 역대 정부는 저마다 청년정책을 내세워왔지만, 대다수가 현금성 지원과 단기 처방에 머물렀다. 노무현 정부의 청년인턴제, 이명박 정부의 마이스터고 육성, 박근혜 정부의 청년희망펀드, 문재인 정부의 청년구직활동지원금과 공공기관 채용비리 근절 등은 일자리의 양적 확대보다 ‘지원’ 중심에 그쳤다. 윤석열 정부 역시 청년 도약장려금과 고졸청년 직장적응 지원 등을 내놓았지만, 청년 일자리 미스매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지원책이 아니라 견인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새 정부는 청년 고용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실천적 대안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