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칼럼] 허물을 내 것으로 품는 성찰 연일 쏟아지는 폭우와 무거운 습기가 온 대지를 짓누르는 장마철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궂은 날씨는 육신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일상의 걸음을 무겁게 만들기 마련이기에, 이 고단한 계절일수록 스스로의 건강을 살피는 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현대인들을 더욱 지치고 아프게 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가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우리 사회의 답답한 현실이다. 장마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걷히기 마련이지만, 공동체를 덮은 정서적·정치적 장마는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 전반은 민감하게 날이 서 있다. 언론과 정치권은 물론 대중의 시선까지도 모든 사안을 오직 ‘좌와 우’, ‘내 편과 네 편’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시각으로만 재단하려 든다.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적인 거부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우리 편의 허물은 어떻게든 합리화하며 덮으려 급급하다.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 공동체에 진정으로 유익한 방향이 무엇인지는 이미 변두리의 문제로 밀려난 지 오래다.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며 비난을 퍼붓는 소리만 가득한 지금, 사회는 서로를 치유하고 통합하는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채 깊은 갈등
[이상수 칼럼] 비 걱정의 굴레와 부러움이라는 가면 장마철 비는 당연한 하늘의 이치건만, 인간의 마음은 날씨 하나에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제만 해도 가뭄을 걱정하며 텃밭 곡식에 조롱으로 물을 주었는데, 막상 아침 출근길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니 이번에는 비 피해가 앞선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걱정, 오지 않으면 오지 않아서 걱정이다. 이렇듯 인간의 걱정이란 늘 나를 떠나지 못하고 일상이 되어 그림자처럼 동행하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걱정은 대부분 '부러움'이라는 돋보기에서 시작된다. 내 손에 쥔 것은 별것 아닌 것처럼 작아 보이고, 남의 손에 들린 것은 유독 커 보이는 심리 말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이 마음은 매한가지다. 다만 어른은 체면이라는 두꺼운 가면 아래 이를 묻어두고 태연한 척할 뿐이다. 막상 부러운 것을 다 이룬 이들에게 물어보면 공통적인 대답은 "별것 없다"는 싱거운 독백이다. 죽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할 부러움의 잔재들을 붙잡고 우리는 왜 이토록 서성이는가. 인생 갑자(甲子)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여전히 부러움에 눈이 멀어 하늘 앞에 가져갈 이렇다 할 '인생 실적'이 없음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공수래공수거가 아닌 '사랑
[이상수 칼럼] 자연의 순환에서 배우는 ‘상도(商道)’의 본질 깊은 산속, 홀로 거목이 되어 숲을 이루는 나무는 없다. 거목이 머리 위로 햇빛을 한껏 받을 때, 그늘 아래에서는 작은 풀들이 자라나고 떨어진 낙엽은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키운다. 산마루에 내린 빗방울 역시 높은 곳에 고이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해 흘러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며,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자연은 이처럼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보완하며 주고받는 막힘없는 순환을 통해 전체의 생명을 지속한다. 인간이 영위하는 시장경제 생태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만물은 저마다의 유기적 연계 속에서 존재 목적을 지닌다. 돈 역시 끊임없이 흘러야 살아 숨 쉬고, 사회 구성원 사이를 돌며 건강하게 순환할 때 비로소 경제가 활력을 얻는다. 돈은 어딘가에 가두어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처럼, 가장 필요한 곳으로 낮게 흘러갈 때 비로소 제 가치와 역할을 증명하는 법이다. 얼마를 소유해야 만족할 수 있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흔히 묻는다. “얼마를 가져야 부자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마주해야 할 더 본질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얼마를 가져야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인
[이상수 칼럼] 잠자듯 가고 싶다는 소망의 이면 요즘 나이 지긋한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흐르는 정서가 있다. "그저 자는 듯이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는 나지막한 고백이다. 이 말 속에는 더 이상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축복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풍경이 담겨 있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고, 병원 침대에 묶여 인위적인 숨을 이어가지 않으며, 치매라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자신과 가족의 영혼을 갉아먹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한 바람이다. 과거에는 "백수(百壽)를 누리소서"가 최고의 덕담이었지만, 이제는 "고생하지 말고 편안하게 가라"는 말이 가장 큰 축복이자 위로로 통한다. 세상이 그만큼 늙어버렸고, 오래 사는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아름답게 떠나는 지혜는 오히려 망각의 늪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 해서 그와 비례해 인간의 행복과 존엄이 길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은 왜 원하는 대로 죽지 못하는가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누구나 평온한 마지막을 소망하지만, 정작 그 소망을 이루며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이는 긴 병마 속에서 육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어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이상수 칼럼]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눈과 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세상은 침묵하고, 마음이 열려 있으면 작은 새의 지저귐과 풀잎 하나에도 삶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경청(傾聽)이라는 말은 기울일 경(傾)과 들을 청(聽)이 합쳐진 글자다. '기울일 경'은 마음을 한곳으로 향하게 하고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며, '들을 청'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살피고 마음으로 헤아려 상대를 이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경청은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표정을 읽으며, 마음으로 상대의 뜻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과 겸손을 드러내는 삶의 태도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무서운 질병, '듣지 못하는 병' 오늘날 우리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다. 소통의 홍수 속에서 정작 타인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감각은 마비되었다. 비극적인 것은, 소위 교양을 갖추고 인격적 수행을 했다는 이들조차 이 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깊이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의 여지를
폭풍전야의 두려움, 그러나 바다는 태풍을 기다린다 [이상수 칼럼] 해마다 여름과 가을 사이, 바닷가 마을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기상청의 태풍 특보가 발령되면 어부들은 서둘러 배를 항구에 묶고, 농민들은 쓰러질지 모르는 농작물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거센 바람은 지붕을 흔들고, 집어삼킬 듯한 파도는 인간이 쌓아 올린 안온한 일상을 단숨에 무너뜨릴 것처럼 위협적이다. 인간에게 태풍은 언제나 피하고 싶은 재앙이자, 두려움과 걱정의 동의어였다. 그러나 인간의 시선을 걷어내고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면, 무척이나 신비롭고 이질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파괴적인 재앙으로만 보이는 그 격렬한 태풍을, 바다는 오히려 온몸으로 반긴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는 비명과 비탄으로 가득 찬 지옥처럼 보이지만, 그 수면 아래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명 운동이 일어난다. 태풍은 거대한 스터러(Stirrer)가 되어 수십, 수백 미터 아래 멈추어 있던 깊은 바닷속을 사정없이 뒤집어 놓는다. 오랫동안 고여 있어 산소가 희박해진 바닥층에 수면의 신선한 산소가 골고루 공급되고,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풍부한 영양염류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른
개입의 덫, 갈매기 사라진 고양이 섬 [이상수 칼럼] 방파제와 골목을 점령한 고양이 떼. 섬을 찾을 때마다 갈매기 대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처음에는 그저 "섬에는 고양이가 많구나" 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이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개입이 만들어 낸 일그러진 결과물임을 알게 된다. 하늘이 처음부터 섬을 고양이만의 공간으로 점지한 것은 아니다. 원래 섬은 갈매기가 날고,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며, 뱀이 들판을 가로지르고 곤충이 꽃을 찾는, 수많은 생명이 얽히고설킨 정교한 생태의 그물망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쥐를 잡겠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고양이를 들여놓으면서 이 단단하던 균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쥐가 줄어들자 고양이는 새의 알과 새끼를 사냥했고, 이어 뱀을 잡았으며, 바닷가의 작은 생물들까지 위협했다. 결국 바닷새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섬은 다양성이 살아 숨 쉬던 공간에서 특정 종이 지배하는 단일 생태계로 전락해 버렸다. 방임이 부른 재앙, 숲을 삼킨 염소 떼 이러한 비극은 비단 고양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인도에 방목된 염소가 만든 '돌의 섬' 역시 우리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린다. 보양식이나 관리의 목
[이상수 칼럼] 월드컵 응원 열기가 여름 공기마저 더욱 뜨겁게 달굽니다. 거리마다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자기 나라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붉은 물결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골이 터지는 순간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눕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무조건 내 나라가 이겨야 한다고 응원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마음을 비우고 더 잘 준비하고 더 정정당당하게 싸운 팀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이 옳을까? 만약 성인(聖人)이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다면 어떤 마음으로 응원할까?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애국심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응원하듯, 국민이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대한민국이 골을 넣으면 가슴이 뛰고, 태극기가 휘날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선수들의 땀방울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승리의 기쁨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응원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아름다운 힘입니다. 애국심과 편 가르기는 다르다 그러나 애국심이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상대
[이상수 칼럼] 모래밭에 피어난 꽃 초여름 바닷가를 걷다 보면 모래밭 위에 붉게 피어난 해당화를 만나게 된다. 짠 바닷바람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모래를 쓸어가는 척박한 땅이다. 농부라면 결코 좋은 땅이라 부르지 않을 자리다. 그런데도 해당화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문득 생각하게 된다. 왜 해당화는 저토록 아름다운가. 그 이유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최선 때문일 것이다. 해당화가 모래밭을 떠나지 않는 이유 해당화는 유난히 바닷가 모래밭을 좋아한다.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더 좋은 땅도 있고 더 편한 환경도 있을 텐데 왜 굳이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곳을 고집하는 것일까. 해당화의 뿌리는 모래를 단단히 붙잡아 준다.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를 지키고, 바람에 날아가는 해변을 붙들어 준다. 해당화가 자라는 곳은 모래언덕이 보존되고, 해안 생태계가 살아난다. 아름다운 해변 뒤에는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해당화의 헌신이 숨어 있다. 해당화는 자신만을 위해 꽃을 피우지 않는다. 아름다운 해변을 지키고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상생의 삶이다. 결국 해당화가 척박한 모래밭을 떠나지 않는
[이상수 칼럼]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신입니까, 부모입니까?” 사람들은 언제나 눈앞의 불행을 마주할 때 원인을 찾고 책임을 물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인과관계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장 3절의 이 짧은 선언은 장애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을 송두리째 뒤바꾼 위대한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저주나 부끄러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거룩한 통로로 바라보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소모적인 질문을 멈추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존재 자체로 존귀한 당당함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장애를 부족함이나 결핍, 혹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편견 속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곤 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들여다보면 장애는 숨겨야 할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함의 이유가 됩니다.
[이상수 칼럼] 아침 뉴스를 켜니 참정권 수호를 외치며 올림픽경기장에 모인 2030 청년들의 소식이 전해졌다. 부모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시대의 과제를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며 거리로 나섰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대화와 경청이 아니라 불법 단체라는 낙인과 핍박이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온라인 공간으로 모여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 뉴스를 보며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젊은 세대가 광장에 나서야 하는 현실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묻는 어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오늘의 문제는 청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오랫동안 미뤄온 책임이 오늘의 현실을 만들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개혁해야 할 것은 뒤로 미뤘으며, 갈등은 봉합하지 못한 채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겨왔다. 그리고 이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진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자, 오히려 그들을 문제의 원인처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어른들의 책임의 위기다. 진정한 어른은 자녀에게 짐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라 짐을 덜어주는 사람이다. 부모는 자신이 고생하더라도 자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최해선 칼럼] 탈무드에는 '누군가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는 지혜로운 가르침이 있다. 이 오래된 격언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균형발전 및 지역발전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행 지역 지원 정책은 일시적이고 시혜적인 지원금 보조를 넘어, 지방자치단체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성장하고 재정적 자립을 이룰 수 있는 견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현재 추진 중인 농어촌 기본소득 사업은 국비 40%, 도비 30%, 군비 30%라는 매칭 펀드(재원 분담)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중앙과 광역, 기초지자체가 책임을 분담하는 합리적인 구조처럼 보이지만, 이는 재정자립도가 극히 낮고 자체 수입으로 공무원 인건비조차 충당하기 버거운 연천군과 같은 취약 지자체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재정적 부메랑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연천군이 매년 부담해야 할 군비 재원이 연간 200억 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이는 단순한 예산 배정의 문제를 넘어 서서히 지방재정의 숨통을 조여오는 ‘지속 가능성’의 위기이자 생존의 문제이다. 이처럼 일률적인 지
[이상수 칼럼] 서늘한 기운 속에서 가만히 산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자연이 삶에 건네는 위대한 철학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스승은 어쩌면 말 없는 ‘물’일지 모릅니다. 물은 스스로를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오직 낮은 곳으로만 흐릅니다. 둥근 그릇을 만나면 둥글게, 네모난 그릇을 만나면 네모나게 자신을 비워 맞추는 유연함이 물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 물의 여정이 마침내 가닿는 종착지, 바다에 이르면 물의 철학은 온 세상을 품는 위대한 사랑의 실체로 격상됩니다. 한자 ‘海’ 자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 우리가 무심히 쓰는 한자 바다 해(海) 자와 순우리말 ‘바다’의 속뜻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만물의 이치와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숭고한 포용의 정신이 놀라울 정도로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한자 ‘海’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海 = 氵(물 수) + 每(매양 매) 바다 해(海) 자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氵)’과 늘 변함없음을 뜻하는 ‘매양 매(每)’ 자가 결합한 글자입니다. 그리고 ‘매양 매(每)’ 자의 중심에는 ‘어머니(
[이상수 칼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잔치의 비유는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준비하신 구원의 역사와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혼인잔치는 신랑과 신부가 하나 되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가장 큰 기쁨의 자리이다. 성경에서 혼인잔치는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 되고, 잃어버린 자녀를 다시 품는 회복과 완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잔치의 중심은 음식이 아니라 주인의 기쁨이며, 그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데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밭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소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장가를 들었으니 갈 수 없다고 했다. 모두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자신의 형편과 이해관계를 앞세웠다. 영원한 가치를 일상의 바쁨 속으로 밀어낸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며 흔히 "길거리의 사람들도 초대를 받았으니 은혜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초대받은 사람들이 끝내 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다. 오랜 시
[이상수 칼럼] 6·3 지방선거가 남긴 얼룩이 짙다.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 결과에 마음 졸이던 민심에 불을 질렀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요, 가뜩이나 의심 가득한 가마솥에 기름을 부은 모양새다. 조선조 이래 우리의 정쟁(政爭) 역사를 보면, 대의(大義)보다는 ‘내 편이 이겨야 우리가 득을 본다’는 맹목적 당동벌이(黨同伐異)가 주를 이루었다. 내 편이 아니면 상대의 선행(善행)조차 악행으로 왜곡해 본다. 눈먼 욕심 탓이다. 생각이 비틀리면 속이 불편하고, 속이 꼬이면 공동체의 건강마저 허물어진다. 내가 지지하지 않은 후보가 되었더라도 “저쪽이 더 땀을 흘렸구나” 하고 마음 한 자락 넓혀주는 넉넉함이 아쉬운 시절이다. 선거에 진 이들은 “신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하늘을 원망하곤 한다. 하지만 이만 한 풍파 속에서도 나라가 버텨내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신의 가호(加護) 덕분 아닐까. 문득 미국 시인 메리 스티븐슨의 ‘모래 위의 발자국’ 일화가 스친다. 한 사람이 인생 행로를 되돌아보니, 평탄할 때는 신과 자신의 발자국이 나란히 두 쌍이었는데, 가장 고통스럽던 시절에는 오직 한 쌍뿐이었다. 그가 서운해하며 “왜 힘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