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칼럼]
격랑 속의 약속
7월 17일은 제헌절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신이 처음으로 문서에 새겨진 날이다. 나라에도 생일이 있다면 바로 오늘 일 것이다. 1948년 여름의 한반도는 지금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해방의 기쁨은 짧았고, 거리마다 좌우 이념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북녘에서는 공산주의 체제가 굳어지고 있었고, 남녘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산고(産苦)를 겪고 있었다. 그 격랑 속에서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했다. 총성이 멎은 뒤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총성이 들려오기 직전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헌법은 단순한 법전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를 세계 만방에 선언한 시대의 엄숙한 약속이었다.
길을 잃은 정치
그로부터 8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는 다시 제헌절을 맞이한다. 외형은 눈부시게 성장했으나, 국민의 마음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깊게 갈라진 듯하다. 정치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진영의 이름 뒤에 숨어 끊임없이 반목한다. 좌파는 평등과 복지,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말한다. 우파는 자유와 책임, 시장경제와 법치를 강조한다. 두 철학 모두 인간과 국가를 구원하고자 하는 나름의 숭고한 이상을 품고 있다.
진짜 문제는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념을 사유화하는 정치꾼의 ‘정치’에 있다. 우리는 보수 정부도, 진보 정부도 모두 경험해 보았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뒤집어질 때마다 국민은 과연 더 행복하고 하나가 되었는가.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저출생과 고령화는 재앙 수준으로 다가왔으며, 경제는 지역과 세대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오늘날의 정치는 국민을 통합하기보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편을 가르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을지 몰라도, 국민의 삶은 황폐해졌다. 제헌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 획득 그 자체가 아니다. 권력을 도구 삼아 국민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있다. 추구하는 목적이 달라 정당은 다를 수 있지만 국민은 하나이며, 선거는 끝이 있어도 국가는 계속되어야 한다. 상대를 섬멸하는 정치는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뿐, 결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지금 국민이 갈망하는 것은 좌파의 승리도, 우파의 승리도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승리'다.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백성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가 제시한 목민관은 권세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대리인이었다. 청렴하지 못한 권력은 백성을 병들게 하고, 공정하지 못한 법은 나라를 뿌리째 흔든다고 경고했다. 공자 역시 덕(德)을 정치의 근본으로 보았다. 법과 형벌만으로 윽박지르면 백성은 처벌을 피하는 데만 급급해지지만, 덕으로 다스리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길을 걷는다고 가르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현들의 답은 하나로 수렴한다. 정치는 결국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본질이다.
정의의 마지막 울타리, 법
아무리 뜻이 훌륭한 정치라 한들 법치의 원칙을 대신할 수는 없다. 법은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모두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공공의 보루다. 법은 정의의 마지막 울타리이자 공정의 유일한 잣대다. 법이 권력의 입김에 흔들리면 사회의 정의가 흔들리고, 정의가 무너지면 공동체를 지탱하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도 함께 소멸한다. 좋은 정치는 좋은 법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그 법을 적용하는 일이다.
헌법을 넘어, 미래의 약속으로
제헌절은 단순히 빛바랜 종이 위의 헌법 조문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다시 확인하는 날이다. 우리는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대한민국을 잠시 수임받은 '현재의 대표'다. 동시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미래의 수임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의 선택, 우리가 정치를 대하고 법을 대하는 태도가 곧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나라의 격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어깨 위에 놓인 시대적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과거를 지키는 책무와 미래를 열어가는 책무가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헌법은 나라의 뼈대를 세우고 법은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 뼈대 위에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과 '서로를 존중하는 품격'이라는 살이 붙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차가운 해골에 불과할 것이다. 이번 제헌절에는 박제된 헌법 조문 너머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뜨거웠던 건국의 정신과 백성을 먼저 품으려 했던 선현들의 지혜를 다시 심장에 새겨야 할 때다. 그 정신이 오늘날 우리의 삭막한 정치와 일상 속에 따스한 온기로 살아 숨 쉴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를 이어 찬란한 미래를 여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대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