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하늘을 품은 민족, 심청(心淸)의 나라

 

 

 

[이상수 칼럼]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을 보고 가장 놀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대체 이 나라는 종교가 몇 개냐”는 것이다. 절에 다니는 어머니가 새벽예배 가는 며느리를 위해 도시락을 싸주고, 교회 장로가 돌아가신 부모 산소 벌초에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간다. 집안 어른 생신에는 유교식 절을 올리다가도, 마음 답답하면 산에 올라 정화수 떠놓고 두 손을 모은다. 서양인의 눈에는 이것이 종교적 혼란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한국인의 오래된 정신 구조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늘을 향한 마음”이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한국인을 두고 “심청(心淸)한 민족”이라 했다. 마음 심(心), 맑을 청(淸). 단순히 착하고 순하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늘을 모시고 산다는 의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 사이의 정을 귀하게 여기며, 공동체의 아픔을 자기 일처럼 끌어안는 정신이다. 그래서 가난해도 제사는 끊지 않았고, 배고파도 손님상에는 국 한 그릇 더 올렸다. 한국인의 정(情)은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생활철학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나라는 시작부터 이상했다. 대개 나라를 세운 건국 신화에는 칼과 전쟁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곰이 사람이 되어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건국 이념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이다. 남을 정복하라는 말이 아니라 함께 살리라는 것이다. 참으로 한국적인 시작이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산마다 절을 짓고 범종 소리 속에서 마음을 닦았다. 조선은 유교를 세웠다. 충과 효, 예와 의를 앞세워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쳤다. 대한민국에 와서는 기독교가 급속히 퍼졌다. 새벽기도 종소리가 민족의 새벽을 깨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들어올 때마다 이전 것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 같았으면 종교전쟁이 났을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절 다니던 사람이 교회도 가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조상 묘를 돌본다. 성황당 돌무더기 앞에서 두 손 모으던 마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종교적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한국인의 독특한 포용성이다. 하늘을 찾으려는 마음이 너무 깊어서 어떤 종교든 그 안에서 하늘의 흔적을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깊은 우물은 어느 방향에서 물을 길어도 결국 같은 샘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의 종교관이 그렇다. 불교의 자비도, 유교의 윤리도, 기독교의 사랑도 결국 인간을 더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길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가 달라도 함께 김장을 하고, 함께 장례를 치르고, 함께 나라 걱정을 한다. 싸우다가도 정이 남고, 미워하다가도 밥 한 끼는 먹인다. 이것이 한국인의 이상한 힘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참 많이도 얻어맞았다. 몽골이 쳐들어왔고, 왜란과 호란이 지나갔고, 근대에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잃었다. 그런데도 역사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한국이 먼저 남의 나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은 드물다. 맞고도 살아남았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났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아마도 “하늘이 보고 있다”는 마음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한국에는 유난히 기도 문화가 많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손을 모으고,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을 위해 비는 어머니들이 있었다. 서양 학자들은 이런 모습을 미신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자연, 하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오래된 정서가 숨어 있다. 한국인은 원래 하늘과 대화하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사상가들도 이 점을 자주 말했다. 함석헌은 한국인을 “뜻을 품은 백성”이라 했고, 이어령은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영성의 문화가 흐른다고 말했다. 최제우는 사람 안에 하늘이 있다고 외쳤고, 정약용 역시 인간의 마음속에 천리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시대는 달라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 셈이다. 사람 마음 깊은 곳에 하늘이 있다는 것.

 

이제 인류는 종교가 서로 자기만 옳다고 싸우는 시대를 넘어야 한다. 불교는 욕심을 비우고 자비를 가르쳤고, 유교는 인간의 도리와 윤리를 세우려 했다. 기독교는 하나님 사랑과 형제애를 말한다.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통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누가 옳으냐”보다 “어떻게 함께 살리느냐”를 묻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의예지, 기독교의 사랑이 서로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애 안에서 만날 때 인류는 비로소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그 가능성을 몸으로 살아온 민족인지도 모른다.

 

심청은 단지 옛이야기 속 효녀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마음이다. 눈앞의 이익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더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도 끝내 품어주려 하며, 울면서도 다시 정을 나누는 마음이다.

 

한국은 작은 나라다. 자원도 많지 않고 땅도 넓지 않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살아남았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진짜 힘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늘을 품으려 했던 마음인지 모른다. 서로를 살리려는 따뜻한 심성, 보이지 않는 가치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정신, 바로 그 “심청의 힘” 말이다.

 

세상이 점점 계산에 밝아질수록, 한국인은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남아 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으로 세상을 품을 것인가.

 

그 답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가슴속에 있었다.
하늘을 품은 마음.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