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칼럼]
잠자듯 가고 싶다는 소망의 이면
요즘 나이 지긋한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흐르는 정서가 있다. "그저 자는 듯이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는 나지막한 고백이다. 이 말 속에는 더 이상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축복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서글픈 풍경이 담겨 있다.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고, 병원 침대에 묶여 인위적인 숨을 이어가지 않으며, 치매라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자신과 가족의 영혼을 갉아먹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한 바람이다. 과거에는 "백수(百壽)를 누리소서"가 최고의 덕담이었지만, 이제는 "고생하지 말고 편안하게 가라"는 말이 가장 큰 축복이자 위로로 통한다. 세상이 그만큼 늙어버렸고, 오래 사는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아름답게 떠나는 지혜는 오히려 망각의 늪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 해서 그와 비례해 인간의 행복과 존엄이 길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은 왜 원하는 대로 죽지 못하는가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누구나 평온한 마지막을 소망하지만, 정작 그 소망을 이루며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이는 긴 병마 속에서 육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어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채 야윈 시간의 끝을 붙잡고 서 있다. 평생을 당당하게, 남에게 베풀며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이들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기저귀를 차고 가족의 손길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종말을 보며 인생의 실패나 불행이라 말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인간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그저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온 삶을 최종적으로 펼쳐 보이고 정리하는 거울일 뿐이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총체적인 결산이자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잊고 사는 유일한 존재, 인간
자연의 섭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발버둥 치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가을날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붉게 물든 가을 단풍은 땅으로 떨어질 날을 미리 계산하며 불안해하지 않는다. 철새는 떠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날개를 펴며, 연어는 자신의 온몸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새 생명을 위해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죽음을 순응과 완성으로 받아들이지만, 유독 인간만이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철저히 외면하며 살아간다. 일상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조금이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황급히 화제를 돌리고, 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와 검은 옷을 벗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영원히 살 것처럼 다시 탐욕을 쌓아 올린다. 참으로 기묘한 모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번복 없는 약속은 오직 죽음 하나뿐인데, 인간은 그것을 가장 불확실하고 나와 관계 없는 먼 일처럼 대하며 오늘을 허비한다.
부고장이 가르쳐 주는 인생의 순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휴대전화에 쌓이는 메시지의 성격이 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는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결혼식 청첩장이 가득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생의 마감을 알리는 부고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찻집에 마주 앉아 노년을 논하던 친구가 오늘 아침 차가운 영정사진 속에서 쓸쓸히 웃고 있고, 불과 몇 달 전까지 건강을 과시하며 호기롭게 웃던 이가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럴 때마다 남아 있는 이들은 짐짓 놀라며 이야기한다. "설마 그 사람이 그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다"고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순서를 예약하거나 개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먼저 떠난 이가 특별히 불운했던 것이 아니라, 먼저 간 이는 제시간에 떠난 것이고 아직 남아 있는 우리는 그저 잠시 차례를 기다리며 어딘지 모르는 간이역에 서 있을 뿐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평등 앞에서는 세상의 왕도, 천문학적인 재벌도, 지식을 자랑하던 교수도, 거리에 누운 부랑자도 모두 같은 기다림의 번호표를 쥐고 서 있는 여행자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의 의미
흔히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한다고 하면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지 고민하고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일을 떠올린다. 물론 남겨진 이들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절차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남겨질 사람들을 위한 사후 처리에 가깝지 떠나는 사람 자신의 영혼을 위한 본질적인 준비는 아니다. 떠나는 이가 해야 할 진짜 준비는 물질의 분할이 아니라 마음의 청산이다. 평생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미움의 덩어리를 녹여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 나로 인해 상처 입었던 이들에게 때늦지 않게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일, 삶의 길목마다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이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일, 그리고 차마 부끄러워 꺼내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자식들의 가슴에 심어주는 일이다. 움켜쥐려는 욕심은 줄이고 마음의 감사는 늘리며, 억울했던 원망을 미련 없이 비워내는 과정이 그것이다. 죽음은 육체가 이 세상에서 퇴장하는 물리적 사건이지만, 그 마지막 순간을 채우는 평안과 존엄은 오직 마음의 결이 결정한다. 평생을 움켜쥐는 욕심으로만 점철해 온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얗게 굳은 손을 펴지 못하고 괴로워하지만, 평생을 사랑과 베풂으로 채워온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세상 모든 것을 향해 웃으며 편안이 손을 놓을 수 있다.
아름다운 죽음은 아름다운 삶의 결과이다
세상 사람들은 병치레 없이 잠 자듯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을 두고 최고의 '객사(客死)가 아닌 복 받은 죽음'이라 칭송한다. 고통의 시간을 줄였다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진짜 거룩한 복은 어떤 방식으로 죽느냐가 아니라, 그 죽음의 순간까지 어떤 내용을 채우며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다. 비록 오랜 시간 하얀 병상에 누워 육신의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와 사랑의 언어를 남기고 자신의 생을 후회 없이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런 고통 없이 자는 듯이 깔끔하게 숨을 거두었을지라도, 그가 지나온 평생의 발자국에 오직 미움과 시기, 타인을 향한 탐욕만 가득했다면 그 죽음을 감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죽음의 품격과 가치는 마지막 순간의 외적 형태나 기술적인 방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갈고닦아 온 인격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생의 마지막 날에 닥치는 일회적인 과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연속선상에 있다. 오늘을 어떻게 채웠는가가 결국 나의 마지막 하루를 빚어내는 법이다.
산다는 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긴 여정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서도 몇 년 동안 설계도를 그리며 자금을 모으고 온갖 정성을 쏟는다. 낯선 이국땅으로 며칠 여행을 떠날 때조차 캐리어에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며 며칠 밤을 설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인간이 맞이해야 할 가장 멀고도 확실한 최종 여행인 죽음 앞에서만큼은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맞이하려 든다. 만약 이 세상에서 눈을 감는 것이 삶의 완벽한 소멸이자 끝이라면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거대한 비극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이 물질 세계를 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과정의 일부라면,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절벽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리는 축복의 문(門)이 된다. 그 어두운 문을 통과하는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지극히 가볍고 투명한 마음이다. 평생을 바쳐 모았던 돈도, 세상이 우러러보던 명예도, 서슬 퍼런 권력도 그 문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모두 내려놓아야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와 나누었던 따뜻한 사랑만큼은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 평생을 지켜온 선한 양심도 버릴 필요가 없으며,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온 삶의 향기도 고스란히 영혼에 묻혀 가져갈 수 있다. 결국 인간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오직 자신의 상대를 사랑한 마음뿐이다.
미소를 머금고 떠나는 사람의 유산
언젠가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이 세상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것이 차가운 병실 안이 될지, 정든 나의 집 안방이 될지, 혹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낯선 길목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종말의 날이 언제 우리를 찾아올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날을 어떤 태도와 표정으로 맞이할지는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 명확하게 결정해 준다. 진정으로 잘 죽는 사람은 평생 죽음의 메커니즘을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삶 최선을 다해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낸 현자다. 죽음 앞에서 초연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죽음이 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리는 체념자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허락된 하루를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이 치열하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오래 사는 기술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미련 남기지 않고 아름답게 떠날 줄 아는 내면의 지혜다. 매일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 살고, 만나는 이들에게 선한 사랑을 남기며,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고, 나에게 상처 준 이를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아는 삶. 그렇게 매일의 하루를 밀도 있게 살아낸 사람이라면, 오늘 밤 깊은 잠에 드는 것조차 결코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거대한 막이 내리고 지상에서 마지막 잠이 찾아오는 그 순간, 우리는 두려움 대신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세상과 작별하며 이 한마디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잘 살았다. 나는 이제 나의 참된 고향, 본향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이라는 거대한 공포를 온전히 이겨낸 인간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품격 있고 아름다운 마지막 인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