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 이후의 인생이 외로워지는 이유는 일터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일과 함께 사람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 맺은 관계는 대부분 ‘직함’이라는 연결 고리 속에서 유지되어 왔기에,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관계도 함께 희미해진다. 사람들은 종종 퇴직을 ‘휴식의 시작’이라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관계망이 해체되는 출발점이 된다. 새로운 관계를 설계하지 못하면, 마음은 점점 닫히고 언어는 줄어들며, 세상과의 연결선이 끊어진다. “퇴직 후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는 한 퇴직자의 고백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사회적 단절의 경고음이다.
2025년 통계청의 『고령층 사회관계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의 37.2%가 “최근 일주일간 타인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중 절반은 “직장 동료와의 대화가 유일한 사회적 접촉이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의 「중장년 고립·은둔 실태조사」(2025)는 50~64세 인구의 21.5%가 “사회적 관계 단절로 인한 정서적 불안”을 경험한다고 보고했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고 있지만, 관계망은 가장 빠르게 붕괴될 세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정책의 초점은 여전히 ‘일자리 유지’에 머물러 있다. 정부가 인생3모작을 말하지만, 대부분의 과정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는 비어 있다. 퇴직 이후의 관계 설계는 단순한 동호회 가입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다시 짜는 생애기술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만난 한 60대 전직 공무원은 “이젠 누구에게도 내 하루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며 매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의 변화는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관계의 루틴’을 다시 세운 결과였다. 하루 10분의 대화, 주 1회의 만남이 사회적 면역력을 지키는 최소한의 기술임을 보여준다.
고령화 사회의 진짜 위험은 질병이 아니라 관계의 퇴화에 있을 것이다. 서울대 의과대학(2025)은 “사회적 관계 빈도가 높을수록 우울 위험은 43%, 치매 발병률은 27% 낮다”고 밝혔다. 이는 건강의 결정 요인이 돈이나 약이 아니라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은 여전히 ‘관계의 기술’을 개인의 성격 문제로 축소한다. 이제는 ‘관계 역량’을 사회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정책의 핵심지표로 반영해야 할 것이다.
첫째, 정부는 ‘사회적 관계 역량(Social Competence)’을 생애주기별 역량지표에 포함시켜야 한다. 국가역량체계(NQF)는 직업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나, 앞으로는 타인과 협력하고 공감하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은 중장년 대상 관계역량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감정표현·경청·갈등관리·협업 등을 훈련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인성교육이 아니라, 사회적 연결을 복원하는 공공 인프라가 될 것이다.
둘째, 지역 단위의 ‘사회적 네트워크 허브’를 구축해야 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함께 사는 서포터즈’(2025)는 소규모 모임을 통해 지속적 교류를 촉진했고, 참여자의 83%가 “삶의 활력이 되살아났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관계의 회복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지역경제의 순환과 사회적 연대의 에너지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세대 간 ‘관계 멘토링 제도’를 제도화해야 한다. 중장년은 경험은 많지만 디지털 감각이 부족하고, 청년은 기술은 뛰어나지만 관계의 깊이가 약하다. 양 세대가 상호 멘토링을 통해 경험과 감각을 나누는 구조를 마련한다면, 세대 간 단절은 완화되고 사회통합의 기반이 강화될 것이다.
넷째, 디지털 시대의 관계 관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과기정통부 『2025 디지털포용지수』에 따르면 60대 이상 디지털 활용률은 48.5%로 전체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이제 관계의 회복은 대면만이 아니라 디지털 관계문해력(Digital Relational Literacy) 확립과 직결될 것이다. 디지털 멘토단을 구성해 중장년층이 온라인 커뮤니티, 화상 소통, 정보활용을 익히도록 지원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여는 문이 될 것이다.
관계의 품격은 친절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과 공감의 기술이며, 함께 늙어가는 사회적 지혜가 될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연결된 개인들의 총합이며, 그 연결의 결이 사회의 품격을 결정한다. 퇴직 이후의 삶은 직업의 연장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이 될 것이다. 관계가 끊기면 삶은 닫히겠지만, 관계가 이어지면 노후도 열릴 것이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 칼럼니스트】는 경영·교육·생애설계 분야 명강사.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생애설계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명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개인메일 charlykim@hanmail.net)